뉴스플러스
해공 신익희 선생 60주기 추모식 열려
- 16.05.09 / 조영문
국민대의 초대 학장이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이었던 신익희 전 국회의장 제60주기 추모식이 지난 5일 오전 11시 국회의사당 헌정기념관에서 (사)해공신익희선생기념사업회(회장 박관용) 주관으로 열렸다. 해공신익희선생기념사업회(회장 박관용) 주관으로 열린 이날 추모식에 본교에서는 유지수 총장, 윤종웅 총동문회장, 김인준 학생처장 등 150여 명이 참석하였다.
유지수 총장은 추모사에서 "해공 신익희 선생님은 광복 이후 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하여 국가를 건설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해방 후 최초의 민족사학인 국민대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해공 선생님의 서거 60주년은 개교 70주년을 맞이하는 국민대학교에 무거운 시대적 책임감과 사명을 남겨줍니다. 앞으로 통일 조국을 이끌어갈 ‘청년 해공들’을 양성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고 다짐하였다.
1892년 7월11일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한 해공은 1908년 한성외국어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했다. 1913년 서울 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7년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수로 옮겼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해외 연락업무를 맡았고 그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 조직을 위한 비밀회의를 갖는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에 기여했다.
해공은 임시정부 수립과 동시에 법무차장, 내무·외무차장, 국무원 비서장, 법무총장, 외무총장, 내무·외무·문교부장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광복 후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 자유신문사 사장, 국민대학 초대학장 등을 겸했고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과 1948년 제헌국회 부의장을 지냈다.
또 1949년 민주국민당을 결성해 위원장에 취임했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국회의장에 피선됐다. 1955년 민주국민당을 민주당으로 확대시켜 대표 최고위원이 됐고 1956년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했지만 그해 5월5일 유세 중 서거했다. 정부는 해공에게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순번 | 언론사 | 제 목 |
---|---|---|
1 | 뉴시스 | 독립운동가 해공 신익희 선생 60주기 추모식 5일 열려 |
2 | 이데일리 | 해공 신익희 선생 서거 60주기 추모식 개최 |
3 | FocusNews | 신익희 선생 서거 60주기 추모식, 5일 국회서 거행 |
4 | 정책브리핑 | 해공 신익희 선생 서거 60주기 추모식 |
5 | 국제뉴스 | 보훈처, 해공 신익희 선생 서거 60주기 추모식 가져 |
제목 | 해공 신익희 선생 60주기 추모식 열려 | 작성자 | 조영문 | ||||||||||||||||||
---|---|---|---|---|---|---|---|---|---|---|---|---|---|---|---|---|---|---|---|---|---|
작성일 | 16.05.09 | 조회수 | 13420 | ||||||||||||||||||
첨부파일 | 구분 | 학부공지 | |||||||||||||||||||
국민대의 초대 학장이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이었던 신익희 전 국회의장 제60주기 추모식이 지난 5일 오전 11시 국회의사당 헌정기념관에서 (사)해공신익희선생기념사업회(회장 박관용) 주관으로 열렸다. 해공신익희선생기념사업회(회장 박관용) 주관으로 열린 이날 추모식에 본교에서는 유지수 총장, 윤종웅 총동문회장, 김인준 학생처장 등 150여 명이 참석하였다. 유지수 총장은 추모사에서 "해공 신익희 선생님은 광복 이후 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하여 국가를 건설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해방 후 최초의 민족사학인 국민대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해공 선생님의 서거 60주년은 개교 70주년을 맞이하는 국민대학교에 무거운 시대적 책임감과 사명을 남겨줍니다. 앞으로 통일 조국을 이끌어갈 ‘청년 해공들’을 양성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고 다짐하였다. 1892년 7월11일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한 해공은 1908년 한성외국어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했다. 1913년 서울 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7년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수로 옮겼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해외 연락업무를 맡았고 그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 조직을 위한 비밀회의를 갖는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에 기여했다. 해공은 임시정부 수립과 동시에 법무차장, 내무·외무차장, 국무원 비서장, 법무총장, 외무총장, 내무·외무·문교부장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광복 후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 자유신문사 사장, 국민대학 초대학장 등을 겸했고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과 1948년 제헌국회 부의장을 지냈다. 또 1949년 민주국민당을 결성해 위원장에 취임했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국회의장에 피선됐다. 1955년 민주국민당을 민주당으로 확대시켜 대표 최고위원이 됐고 1956년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했지만 그해 5월5일 유세 중 서거했다. 정부는 해공에게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