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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해 1번지 울산’ 환경운동 초석 다져 / 한기양 (경영 76)

  • 07.01.15 / 조영문
환경운동연합(1)
‘민중선교’에 뛰어든 신앙인 한기양… ‘공해 1번지 울산’ 환경운동 초석 다져

울산공추련을 그 명칭이 말해주듯이 공추련 지역 조직의 성격을 띠고 출발했다. 사진은 1992년 8월 전국 환경단체 수련회에 참석한 울산공추련 활동가들.

한기양(현 굿미션네트워크 사무총장, 울산환경운동연합 고문)은 맹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다 삼킬 수 없어 절반만 삼키고 나머지는 내뱉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곧 사람들이 올 것이다. 일이 점점 더 커질 것이고, 농성도 장기화할 게 뻔하다.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은데 단식을 강행한 것은 사안이 워낙 긴박해서였다. 그는 눈을 감았다. 무슨 기도를 할까….

1991년 7월 1일 경남 울산군(현 울산광역시) 온산공단 비철연관 5차단지 공터. 환경운동사에서 ‘역사적인 회합’이 이루어진 이날은 그가 한국티타늄 공장 부지인 이곳에 천막을 치고 단식농성에 들어간 지 4일째 되는 날이었다. 당시 그는 듀폰·한국티타늄·럭키금속 등이 계획하던 이산화티타늄 공장의 울산·온산공단 입주를 저지하기 위한 이산화티타늄공장건설저지범시민공동대책위원회 대표를 맡고 있었다.

공해 공장 증설 ‘육탄저지’ 나서

울산 효성교회(현 새생명교회) 담임목사이자 울산공해추방운동연합 준비위원회(이하 울산공추련) 위원장인 그는 원래 울산 사람이 아니었다. 울산에 환경운동을 하러 온 것도, 선교하러 온 것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공해1번지 울산에 더 이상 어떠한 공해공장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이산화티타늄 공장 건설을 ‘육탄 저지’하게 된 사연이 무엇일까.

한기양은 경남 진양에서 태어나 진주고와 국민대 경영학과(76학번)를 나왔다. 원래 보수적인 기독교 집안 출신이었지만 처음부터 목회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환경운동가가 될 생각도 없었다. 대학 시절 운동권으로도 빠지지 않고 학보사 기자로 활동했다.

학교 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그는 중도에 군에 입대했다. 이때까지도 그는 세상을 잘 모르는 모범생 축에 들었다. 그런데 제대한 때가 현대사의 격랑이 대학가를 덮친 시점이었다. 1979년 10·26사태, 1980년 ‘서울의 봄’과 5·18광주민주화운동… 여기서 그의 인생이 바뀐다.

복학해서 학보사에 복직한 그는 운동권이 된다. “이라마 안 대자나.” “사람이 마이 죽었는데 또 폭도로 몰자나.” 그가 운동권이 된 이유는 단순했다. 광주의 참극이 그를 운동권으로 인도한 ‘스승’이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겁이 없어졌다”는 게 그의 최근 회고다.

울산공추련의 창립을 주도한 한기양, 현 울산환경운동연합을 이끌고 있는 김장용·오영애(왼쪽부터).
뒤늦게 운동권이 된 그는 1980년 12월 15일 교내 시위 사건으로 구속되고 만다. 복학한 지 1년도 안 돼서였다. 이듬해 8월 풀려난 그는 당시 운동권의 필수 코스라고 할 수 있는 ‘현장 이전’(공장 위장취업)을 택하게 된다.

신앙인에게는 신의 인도(引導)라는 게 있는 모양이다. 신은 그를 노동운동가보다 다른 용도로 쓰려고 했던 듯하다. 그는 현장 이전에 실패한다. 병이 생긴 데다 개인적인 어려움까지 겹쳐 결국 현장을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 즈음 예장(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쪽이었던 그의 종교적 성향은 진보적인 기장(한국기독교장로회)으로 완전히 넘어가 있었다. 그는 기장에서 운영하던 선교교육원에 들어갔다. 선교교육원은 정치적으로 암울하던 시절 갈 데 없는 운동권 ‘빵잡이’에게 도피처이자 목회자 자격을 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곳이다. 그는 낮에는 ‘마당’지 기자생활을 하고 밤에는 선교교육원에 다녔다. 민청련에도 관여해 한국공해문제연구소의 최열(현 환경재단 대표)과도 이때 알게 됐다.

1987년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고민에 빠졌다. 목회활동이냐 조직운동이냐를 놓고 심한 갈등을 일으켰다. 결국 그는 양쪽과 타협해 ‘민중선교’를 택했다. 인천 부평4공단에 노동자교회를 설립하기로 했다. 사노맹의 지지를 받는 가운데 그는 이를 위한 준비를 착실히 해 나갔다.

여기서 그의 신은 또 한 번 심술(?)을 부린다. 장고 끝에 결정해 준비까지 다 해놓은 노동자교회를 접고 생각지도 않던 울산으로 가라고 명령한 것이다. 1988년 13대 총선이 끝난 직후였다. 그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자.

“얼굴을 모르는 친구가 울산에서 올라와 나를 찾아왔다. 성균관대 운동권 출신인데 진주고 후배라고 했다. 그가 ‘울산에 노동자의 언덕이 돼줄 교회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며 내가 내려가서 그 역할을 해주기를 바랐다. 알고 보니 ‘민중의당’과 연결된 친구였는데 현대중공업 출신 노동자 시인 백무산의 끄나풀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울산에 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대답은 명쾌했다. “이미 늦었다. 좀 일찍 오지.” 그는 후배를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부평에 노동자교회를 세울 준비를 모두 마친 그는 마지막으로 원주 치악산 토굴에 들어가 20일 동안 기도했다. 울산에서 부르는 것이 다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하나님은 아무 응답이 없었다. 그것은 허락을 의미했다.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하산했다. 예수님이 갔던 고난과 복음의 터전 ‘갈릴리’를 향해서….

그런데 서울로 돌아오면서 그의 귓전에 맴도는 성경 구절이 있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라 하시니라.’(요나서 1장 1~2절)

성경에서 요나는 심판을 앞둔 니느웨(고대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를 지칭)를 회개시키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한 예언자로 묘사된다. 요나는 니느웨의 반대 방향으로 가는 배를 탔다가 풍랑을 만나 큰 물고기의 밥이 된다. 구원의 기도 끝에 살아난 요나는 ‘일어나 니느웨로 가라’는 거듭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게 된다.

성경 속 ‘니느웨’ 울산을 향하다

갑자기 그에게 울산이 니느웨로 보였다. 저 큰 성읍 울산이 나를 부르고 있다. 이를 피해 부평으로 갔다가는 큰 고기의 밥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울산에 연락을 취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1988년 8월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아무 연고 없는 울산으로 내려갔다. 다시 그의 회고를 들어보면….

울산 북구 송정동에 위치한 울산환경운동연합.
“처음에는 정이 안 붙었다. 하지만 할 일이 많았다. 울산은 산업화의 아픔이 집약적으로 나타난 곳이었다. ‘급할시’라고 부를 정도로 급팽창한 도시였고 시민사회가 가장 취약한 지역이었으며 향토성마저 붕괴된 곳이었다. 주민등록자는 많지만 울산 사람은 없었다. 여기야말로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다. 예수가 택한 곳, 목사가 가야 할 곳이 갈릴리다. 울산이 바로 갈릴리이고 하나님께서 이미 가라고 하셨다.”

한국 최대의 산업도시인 울산은 환경운동의 메카와 같은 곳이다. 1967년 울산공단이 본격 가동되면서 공해 피해로 인한 주민 투쟁이 시작됐으며, 1978년부터는 온산공단을 중심으로 공해병이 나타나면서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관심과 논란을 야기한 바 있었다. 최열이 ‘세계적인’ 환경운동가로 우뚝 선 것도 1985년부터 시작된 온산병 사태를 통해서였다.

이처럼 울산이 한국 환경문제의 최전방에 서 있었지만 여기에 조직적으로 대처할 환경운동단체가 없었다. 주민대책위와 같은 피해 당사자 조직은 있었지만 이들의 활동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고 시민사회의 역량을 조직할 제3자 기구는 없었다는 얘기다. 온산병 사태에 개입한 환경운동단체는 서울의 공해문제연구소와 부산지부 등이 고작이었고, 현지에서는 울산사회선교실천협의회(이하 울사협)가 참여한 정도다.

온산병 사태의 현지 대책기구는 최열 등 서울의 환경운동가와 공해문제연구소 부산지부의 구자상(현 부산환경운동연합 대표), 울사협의 박종희(현 통일시대충북연대 공동대표) 등이 주요 멤버였다. 구자상은 울산에 출퇴근하다시피 하면서 온산병 대책기구에 참여했다. 박종희는 노동운동을 하려고 청주에서 울산으로 왔다가 울사협 실무간사·사무국장을 맡는 바람에 온산병 대책에 깊이 관계하고, 나중에는 울산 시민사회의 중심 인물이 된다.

그러나 한기양이 울산에 오기까지 자생적인 환경운동은 조직되지 않았다. 한기양은 울산에 터를 잡자마자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다. 당시 울산은 노동운동의 천국이었다. 운동권의 모든 정파에서 내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1976년 최열이 감옥에서 “다들 노동운동하겠다고 하니 그렇게 되면 나라가 큰일나겠다”며 환경운동을 결심했던 것과 비슷한 이치로 그 역시 “정작 울산이 필요로 하는 것은 환경운동”이라고 생각했음직하다.
환경운동단체 통합 논의에 참여한 지역 환경운동가들. 왼쪽부터 구자상(부산)·문창식(대구)·임낙평(광주)·이인식(마산·창원).


최열 초청 첫 공해교실 열어

1988년 12월 그는 본업인 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최열을 초청해 첫 공해교실을 열었다. 자신의 조그만 자취방에서였다. 개척교회 창립 예배에 들어간 것은 그보다 한 달 뒤인 1989년 1월 17일이었다. 교회는 말 그대로 예배드리는 곳이자 공추련 사무실이었고,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사랑방이기도 했다. 자연히 블랙리스트에 오른 인사의 출입이 잦았고, 이에 따라 그 역시 요시찰 인물이 됐다.

울산공추련은 이런 가운데 1989년 7월 3일 출범했다. 원래 이날은 준비위원회의 발족일이었다. 그런데 조직을 정비하기도 전에 이산화티타늄 공장 건설 저지운동 등에 매달리느라 정식 출범식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준비위원회 상태에서 공식 발족을 못 하고 일에 파묻혀 나중에 ‘발족한 걸로 하자’고 하고 창립총회를 했다”고 최근 회고했다(1991년 11월 9일 창립총회를 열었다).

이산화티타늄 공장 반대운동을 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울산을 대표하는 환경운동가가 됐다. 그의 환경운동은 당시의 운동권 출신 환경운동가들처럼 좌파적이고 전투적인 방식에서 출발한 것처럼 보인다. 초기에 그는 매우 ‘액티브한’ 운동을 펼쳤다. 10여 차례의 공해추방 캠페인과 이산화티타늄 공장 설립 저지를 위한 시민서명운동, 그리고 앞에 언급한 천막 단식농성 등이 이를 잘 말해준다.

하지만 그는 신앙인이었다. 환경운동을 하면서 그는 생명에 대해 새롭게 눈뜨게 된다. 2년여 동안 싸우면서 인간사회의 갈등(노동자 문제)보다 피조세계 자체가 신음하는 상황을 푸는 것이 선차적 사명임을 인식한 것이다(2002년 효성교회를 새생명교회로 개명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 당시만 해도 기독교 환경운동권에서는 해명하기가 곤혹스러운 성경 구절이 있었다. 창세기 1장 28절의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생물을 다스리라”라는 구절이 환경파괴를 정당화하는 내용으로 해석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충만하라’의 원어에는 ‘충족시켜라(fulfill)’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정복하라’에도 ‘경작하라(culture)’는 뜻이 있다.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도 생물들이 잘 살 수 있도록 보살피라는, 즉 ‘생태계를 보전하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1998년 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그는 울산의 많은 환경 이슈를 주도했다. 대표적인 예로 그의 반대운동으로 듀폰은 1992년 이산화티타늄 공장 건설을 포기했다. 한국티타늄도 그가 활동한 기간 동안은 공장을 세우지 못했다. 1994년과 1995년에는 울산의 하천과 해양 환경에 대한 종합보고서 격인 ‘울산수질환경지도’와 ‘울산해양환경지도’를 펴냈다. 1992년 리우회의에 다녀와서는 ‘지방의제21’ 계획안을 제안, 울산시가 친환경 정책을 펴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가 물러난 뒤 울산 환경운동의 바톤은 김장용(현 울산환경운합 대표)·오영애(현 울산환경운동연합 정책실장)가 이어받게 된다. 김장용은 울산공추련 시절부터 회원 활동가로 현장을 누빈 울산 환경운동의 산 증인이다. 오영애는 울산대 학생운동권 출신(83학번)으로 민추위 활동, 위장취업, 노조운동 등을 거쳐 1998년 환경운동으로 전업했다. 노동운동의 영향력이 큰 울산에서 노동운동가 출신 환경운동가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시 1991년 7월 1일 상황으로 돌아오면, 한기양이 천막농성 중에 기다린 손님은 전국 환경운동가들이었다. 서울의 공추련과 각 지방 환경단체 대표자들이 이산화티타늄 공장 반대투쟁 지원차 농성장을 방문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이날 공추련 의장인 최열을 비롯해 서울·부산·대구·광주·울산 등 6개 환경단체 대표 20여명이 농성장을 방문했다(한겨레신문 1991년 7월 2일자). 한기양의 기억에 의하면 부산의 구자상, 대구의 문창식(현 대구환경운동연합 운영위원장), 광주의 임낙평(현 광주환경운동연합 의장), 마산의 이인식(현 마창환경운동연합 의장) 등이 참석했다.

‘아시아 최대 단체’의 초라한 출발

이 모임이 중요한 까닭은 전국적인 환경운동 조직 결성이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처음으로 논의된 자리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참석한 각 지역 활동가들이 지금은 그 지역을 대표하는 환경운동의 리더들이다. ‘아시아 최대의 환경운동단체’로 일컬어지는 환경운동연합 조직 작업이 허허벌판의 허술한 천막에서 차도 다과도 없이 한 끼를 굶으면서 맹물을 앞에 놓고 이뤄지기 시작한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주인이 단식을 하고 있으니 맹물밖에 대접할 게 없었지만 소득은 굉장했다. 합의된 사안 중 큰 건만도 3가지였다. 우선 전국 조직의 건설 필요성에 공감했다는 것이다. 다음은 시민환경연구소를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였다. 세 번째가 다음해 열리는 리우회의에 모두 참여하자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이 전국 조직 결성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러 조직을 통합하는 것은 구조조정에 버금가는 일이다. 조직마다 고유한 사정과 이해득실과 나름대로의 기득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부분이 의외로 쉽게 풀린 비밀이 어디에 있을까. 최열의 기억을 빌려보자.

“페놀사건이 터졌을 때 지역에서는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큰 사건이 터지면 무조건 중앙에서 내려가야 일이 됐다. 사안이 발생하면 지역에서 먼저 대응해야 하고, 또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중앙의 힘을 빌려야 할 부분도 있다. 이런 게 잘 안되니까 각 지역에서도 연대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1990년대는 ‘환경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형 환경사안이 폭발적으로 일어난 시기다. 어느 한 지역, 어느 한 단체의 일이라기보다 전국적이고 총체적인 사안이 많았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스펙트럼을 넓혀가기에는 당장 발등에 떨어지는 불덩이가 너무 컸다고 할 수 있었다.

최열은 공해문제연구소 시절부터 공해 현장뿐 아니라 지역이나 단체를 방문해 강연하는 등 ‘환경전도사’ 역할도 소홀하지 않았다. “어떤 때는 하루에 6번 강연한 적도 있다”는 게 그의 회고다. 이런 활동을 통해 그는 환경문제에 관한 한 실핏줄처럼 전국 구석구석까지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가 갖고 있는 네트워크와 상징성이 통합의 강력한 구심점 노릇을 한 점도 전국 조직화를 용이하게 한 측면이 있다.

큰 매듭이 풀리면 나머지는 저절로 풀리는 게 세상 이치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아주 지엽적인 것이라도 고약하게 엉키면 전체를 망칠 수 있다. ‘아시아 최대 환경운동단체’의 출범을 둘러싼 산고(産苦)는 엉뚱한 데서 불거졌다.

<신동호 NIE연구소장 hudy@kyunghyang.com>

출처 : 2007 01/16   뉴스메이커 708호

제목 ‘공해 1번지 울산’ 환경운동 초석 다져 / 한기양 (경영 76) 작성자 조영문
작성일 07.01.15 조회수 19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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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운동연합(1)
‘민중선교’에 뛰어든 신앙인 한기양… ‘공해 1번지 울산’ 환경운동 초석 다져

울산공추련을 그 명칭이 말해주듯이 공추련 지역 조직의 성격을 띠고 출발했다. 사진은 1992년 8월 전국 환경단체 수련회에 참석한 울산공추련 활동가들.

한기양(현 굿미션네트워크 사무총장, 울산환경운동연합 고문)은 맹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다 삼킬 수 없어 절반만 삼키고 나머지는 내뱉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곧 사람들이 올 것이다. 일이 점점 더 커질 것이고, 농성도 장기화할 게 뻔하다.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은데 단식을 강행한 것은 사안이 워낙 긴박해서였다. 그는 눈을 감았다. 무슨 기도를 할까….

1991년 7월 1일 경남 울산군(현 울산광역시) 온산공단 비철연관 5차단지 공터. 환경운동사에서 ‘역사적인 회합’이 이루어진 이날은 그가 한국티타늄 공장 부지인 이곳에 천막을 치고 단식농성에 들어간 지 4일째 되는 날이었다. 당시 그는 듀폰·한국티타늄·럭키금속 등이 계획하던 이산화티타늄 공장의 울산·온산공단 입주를 저지하기 위한 이산화티타늄공장건설저지범시민공동대책위원회 대표를 맡고 있었다.

공해 공장 증설 ‘육탄저지’ 나서

울산 효성교회(현 새생명교회) 담임목사이자 울산공해추방운동연합 준비위원회(이하 울산공추련) 위원장인 그는 원래 울산 사람이 아니었다. 울산에 환경운동을 하러 온 것도, 선교하러 온 것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공해1번지 울산에 더 이상 어떠한 공해공장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이산화티타늄 공장 건설을 ‘육탄 저지’하게 된 사연이 무엇일까.

한기양은 경남 진양에서 태어나 진주고와 국민대 경영학과(76학번)를 나왔다. 원래 보수적인 기독교 집안 출신이었지만 처음부터 목회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환경운동가가 될 생각도 없었다. 대학 시절 운동권으로도 빠지지 않고 학보사 기자로 활동했다.

학교 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그는 중도에 군에 입대했다. 이때까지도 그는 세상을 잘 모르는 모범생 축에 들었다. 그런데 제대한 때가 현대사의 격랑이 대학가를 덮친 시점이었다. 1979년 10·26사태, 1980년 ‘서울의 봄’과 5·18광주민주화운동… 여기서 그의 인생이 바뀐다.

복학해서 학보사에 복직한 그는 운동권이 된다. “이라마 안 대자나.” “사람이 마이 죽었는데 또 폭도로 몰자나.” 그가 운동권이 된 이유는 단순했다. 광주의 참극이 그를 운동권으로 인도한 ‘스승’이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겁이 없어졌다”는 게 그의 최근 회고다.

울산공추련의 창립을 주도한 한기양, 현 울산환경운동연합을 이끌고 있는 김장용·오영애(왼쪽부터).
뒤늦게 운동권이 된 그는 1980년 12월 15일 교내 시위 사건으로 구속되고 만다. 복학한 지 1년도 안 돼서였다. 이듬해 8월 풀려난 그는 당시 운동권의 필수 코스라고 할 수 있는 ‘현장 이전’(공장 위장취업)을 택하게 된다.

신앙인에게는 신의 인도(引導)라는 게 있는 모양이다. 신은 그를 노동운동가보다 다른 용도로 쓰려고 했던 듯하다. 그는 현장 이전에 실패한다. 병이 생긴 데다 개인적인 어려움까지 겹쳐 결국 현장을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 즈음 예장(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쪽이었던 그의 종교적 성향은 진보적인 기장(한국기독교장로회)으로 완전히 넘어가 있었다. 그는 기장에서 운영하던 선교교육원에 들어갔다. 선교교육원은 정치적으로 암울하던 시절 갈 데 없는 운동권 ‘빵잡이’에게 도피처이자 목회자 자격을 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곳이다. 그는 낮에는 ‘마당’지 기자생활을 하고 밤에는 선교교육원에 다녔다. 민청련에도 관여해 한국공해문제연구소의 최열(현 환경재단 대표)과도 이때 알게 됐다.

1987년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고민에 빠졌다. 목회활동이냐 조직운동이냐를 놓고 심한 갈등을 일으켰다. 결국 그는 양쪽과 타협해 ‘민중선교’를 택했다. 인천 부평4공단에 노동자교회를 설립하기로 했다. 사노맹의 지지를 받는 가운데 그는 이를 위한 준비를 착실히 해 나갔다.

여기서 그의 신은 또 한 번 심술(?)을 부린다. 장고 끝에 결정해 준비까지 다 해놓은 노동자교회를 접고 생각지도 않던 울산으로 가라고 명령한 것이다. 1988년 13대 총선이 끝난 직후였다. 그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자.

“얼굴을 모르는 친구가 울산에서 올라와 나를 찾아왔다. 성균관대 운동권 출신인데 진주고 후배라고 했다. 그가 ‘울산에 노동자의 언덕이 돼줄 교회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며 내가 내려가서 그 역할을 해주기를 바랐다. 알고 보니 ‘민중의당’과 연결된 친구였는데 현대중공업 출신 노동자 시인 백무산의 끄나풀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울산에 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대답은 명쾌했다. “이미 늦었다. 좀 일찍 오지.” 그는 후배를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부평에 노동자교회를 세울 준비를 모두 마친 그는 마지막으로 원주 치악산 토굴에 들어가 20일 동안 기도했다. 울산에서 부르는 것이 다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하나님은 아무 응답이 없었다. 그것은 허락을 의미했다.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하산했다. 예수님이 갔던 고난과 복음의 터전 ‘갈릴리’를 향해서….

그런데 서울로 돌아오면서 그의 귓전에 맴도는 성경 구절이 있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라 하시니라.’(요나서 1장 1~2절)

성경에서 요나는 심판을 앞둔 니느웨(고대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를 지칭)를 회개시키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한 예언자로 묘사된다. 요나는 니느웨의 반대 방향으로 가는 배를 탔다가 풍랑을 만나 큰 물고기의 밥이 된다. 구원의 기도 끝에 살아난 요나는 ‘일어나 니느웨로 가라’는 거듭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게 된다.

성경 속 ‘니느웨’ 울산을 향하다

갑자기 그에게 울산이 니느웨로 보였다. 저 큰 성읍 울산이 나를 부르고 있다. 이를 피해 부평으로 갔다가는 큰 고기의 밥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울산에 연락을 취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1988년 8월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아무 연고 없는 울산으로 내려갔다. 다시 그의 회고를 들어보면….

울산 북구 송정동에 위치한 울산환경운동연합.
“처음에는 정이 안 붙었다. 하지만 할 일이 많았다. 울산은 산업화의 아픔이 집약적으로 나타난 곳이었다. ‘급할시’라고 부를 정도로 급팽창한 도시였고 시민사회가 가장 취약한 지역이었으며 향토성마저 붕괴된 곳이었다. 주민등록자는 많지만 울산 사람은 없었다. 여기야말로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다. 예수가 택한 곳, 목사가 가야 할 곳이 갈릴리다. 울산이 바로 갈릴리이고 하나님께서 이미 가라고 하셨다.”

한국 최대의 산업도시인 울산은 환경운동의 메카와 같은 곳이다. 1967년 울산공단이 본격 가동되면서 공해 피해로 인한 주민 투쟁이 시작됐으며, 1978년부터는 온산공단을 중심으로 공해병이 나타나면서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관심과 논란을 야기한 바 있었다. 최열이 ‘세계적인’ 환경운동가로 우뚝 선 것도 1985년부터 시작된 온산병 사태를 통해서였다.

이처럼 울산이 한국 환경문제의 최전방에 서 있었지만 여기에 조직적으로 대처할 환경운동단체가 없었다. 주민대책위와 같은 피해 당사자 조직은 있었지만 이들의 활동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고 시민사회의 역량을 조직할 제3자 기구는 없었다는 얘기다. 온산병 사태에 개입한 환경운동단체는 서울의 공해문제연구소와 부산지부 등이 고작이었고, 현지에서는 울산사회선교실천협의회(이하 울사협)가 참여한 정도다.

온산병 사태의 현지 대책기구는 최열 등 서울의 환경운동가와 공해문제연구소 부산지부의 구자상(현 부산환경운동연합 대표), 울사협의 박종희(현 통일시대충북연대 공동대표) 등이 주요 멤버였다. 구자상은 울산에 출퇴근하다시피 하면서 온산병 대책기구에 참여했다. 박종희는 노동운동을 하려고 청주에서 울산으로 왔다가 울사협 실무간사·사무국장을 맡는 바람에 온산병 대책에 깊이 관계하고, 나중에는 울산 시민사회의 중심 인물이 된다.

그러나 한기양이 울산에 오기까지 자생적인 환경운동은 조직되지 않았다. 한기양은 울산에 터를 잡자마자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다. 당시 울산은 노동운동의 천국이었다. 운동권의 모든 정파에서 내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1976년 최열이 감옥에서 “다들 노동운동하겠다고 하니 그렇게 되면 나라가 큰일나겠다”며 환경운동을 결심했던 것과 비슷한 이치로 그 역시 “정작 울산이 필요로 하는 것은 환경운동”이라고 생각했음직하다.
환경운동단체 통합 논의에 참여한 지역 환경운동가들. 왼쪽부터 구자상(부산)·문창식(대구)·임낙평(광주)·이인식(마산·창원).


최열 초청 첫 공해교실 열어

1988년 12월 그는 본업인 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최열을 초청해 첫 공해교실을 열었다. 자신의 조그만 자취방에서였다. 개척교회 창립 예배에 들어간 것은 그보다 한 달 뒤인 1989년 1월 17일이었다. 교회는 말 그대로 예배드리는 곳이자 공추련 사무실이었고,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사랑방이기도 했다. 자연히 블랙리스트에 오른 인사의 출입이 잦았고, 이에 따라 그 역시 요시찰 인물이 됐다.

울산공추련은 이런 가운데 1989년 7월 3일 출범했다. 원래 이날은 준비위원회의 발족일이었다. 그런데 조직을 정비하기도 전에 이산화티타늄 공장 건설 저지운동 등에 매달리느라 정식 출범식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준비위원회 상태에서 공식 발족을 못 하고 일에 파묻혀 나중에 ‘발족한 걸로 하자’고 하고 창립총회를 했다”고 최근 회고했다(1991년 11월 9일 창립총회를 열었다).

이산화티타늄 공장 반대운동을 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울산을 대표하는 환경운동가가 됐다. 그의 환경운동은 당시의 운동권 출신 환경운동가들처럼 좌파적이고 전투적인 방식에서 출발한 것처럼 보인다. 초기에 그는 매우 ‘액티브한’ 운동을 펼쳤다. 10여 차례의 공해추방 캠페인과 이산화티타늄 공장 설립 저지를 위한 시민서명운동, 그리고 앞에 언급한 천막 단식농성 등이 이를 잘 말해준다.

하지만 그는 신앙인이었다. 환경운동을 하면서 그는 생명에 대해 새롭게 눈뜨게 된다. 2년여 동안 싸우면서 인간사회의 갈등(노동자 문제)보다 피조세계 자체가 신음하는 상황을 푸는 것이 선차적 사명임을 인식한 것이다(2002년 효성교회를 새생명교회로 개명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 당시만 해도 기독교 환경운동권에서는 해명하기가 곤혹스러운 성경 구절이 있었다. 창세기 1장 28절의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생물을 다스리라”라는 구절이 환경파괴를 정당화하는 내용으로 해석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충만하라’의 원어에는 ‘충족시켜라(fulfill)’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정복하라’에도 ‘경작하라(culture)’는 뜻이 있다.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도 생물들이 잘 살 수 있도록 보살피라는, 즉 ‘생태계를 보전하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1998년 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그는 울산의 많은 환경 이슈를 주도했다. 대표적인 예로 그의 반대운동으로 듀폰은 1992년 이산화티타늄 공장 건설을 포기했다. 한국티타늄도 그가 활동한 기간 동안은 공장을 세우지 못했다. 1994년과 1995년에는 울산의 하천과 해양 환경에 대한 종합보고서 격인 ‘울산수질환경지도’와 ‘울산해양환경지도’를 펴냈다. 1992년 리우회의에 다녀와서는 ‘지방의제21’ 계획안을 제안, 울산시가 친환경 정책을 펴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가 물러난 뒤 울산 환경운동의 바톤은 김장용(현 울산환경운합 대표)·오영애(현 울산환경운동연합 정책실장)가 이어받게 된다. 김장용은 울산공추련 시절부터 회원 활동가로 현장을 누빈 울산 환경운동의 산 증인이다. 오영애는 울산대 학생운동권 출신(83학번)으로 민추위 활동, 위장취업, 노조운동 등을 거쳐 1998년 환경운동으로 전업했다. 노동운동의 영향력이 큰 울산에서 노동운동가 출신 환경운동가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시 1991년 7월 1일 상황으로 돌아오면, 한기양이 천막농성 중에 기다린 손님은 전국 환경운동가들이었다. 서울의 공추련과 각 지방 환경단체 대표자들이 이산화티타늄 공장 반대투쟁 지원차 농성장을 방문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이날 공추련 의장인 최열을 비롯해 서울·부산·대구·광주·울산 등 6개 환경단체 대표 20여명이 농성장을 방문했다(한겨레신문 1991년 7월 2일자). 한기양의 기억에 의하면 부산의 구자상, 대구의 문창식(현 대구환경운동연합 운영위원장), 광주의 임낙평(현 광주환경운동연합 의장), 마산의 이인식(현 마창환경운동연합 의장) 등이 참석했다.

‘아시아 최대 단체’의 초라한 출발

이 모임이 중요한 까닭은 전국적인 환경운동 조직 결성이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처음으로 논의된 자리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참석한 각 지역 활동가들이 지금은 그 지역을 대표하는 환경운동의 리더들이다. ‘아시아 최대의 환경운동단체’로 일컬어지는 환경운동연합 조직 작업이 허허벌판의 허술한 천막에서 차도 다과도 없이 한 끼를 굶으면서 맹물을 앞에 놓고 이뤄지기 시작한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주인이 단식을 하고 있으니 맹물밖에 대접할 게 없었지만 소득은 굉장했다. 합의된 사안 중 큰 건만도 3가지였다. 우선 전국 조직의 건설 필요성에 공감했다는 것이다. 다음은 시민환경연구소를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였다. 세 번째가 다음해 열리는 리우회의에 모두 참여하자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이 전국 조직 결성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러 조직을 통합하는 것은 구조조정에 버금가는 일이다. 조직마다 고유한 사정과 이해득실과 나름대로의 기득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부분이 의외로 쉽게 풀린 비밀이 어디에 있을까. 최열의 기억을 빌려보자.

“페놀사건이 터졌을 때 지역에서는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큰 사건이 터지면 무조건 중앙에서 내려가야 일이 됐다. 사안이 발생하면 지역에서 먼저 대응해야 하고, 또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중앙의 힘을 빌려야 할 부분도 있다. 이런 게 잘 안되니까 각 지역에서도 연대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1990년대는 ‘환경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형 환경사안이 폭발적으로 일어난 시기다. 어느 한 지역, 어느 한 단체의 일이라기보다 전국적이고 총체적인 사안이 많았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스펙트럼을 넓혀가기에는 당장 발등에 떨어지는 불덩이가 너무 컸다고 할 수 있었다.

최열은 공해문제연구소 시절부터 공해 현장뿐 아니라 지역이나 단체를 방문해 강연하는 등 ‘환경전도사’ 역할도 소홀하지 않았다. “어떤 때는 하루에 6번 강연한 적도 있다”는 게 그의 회고다. 이런 활동을 통해 그는 환경문제에 관한 한 실핏줄처럼 전국 구석구석까지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가 갖고 있는 네트워크와 상징성이 통합의 강력한 구심점 노릇을 한 점도 전국 조직화를 용이하게 한 측면이 있다.

큰 매듭이 풀리면 나머지는 저절로 풀리는 게 세상 이치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아주 지엽적인 것이라도 고약하게 엉키면 전체를 망칠 수 있다. ‘아시아 최대 환경운동단체’의 출범을 둘러싼 산고(産苦)는 엉뚱한 데서 불거졌다.

<신동호 NIE연구소장 hudy@kyunghyang.com>

출처 : 2007 01/16   뉴스메이커 70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