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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학교 경상대학

기획특집

호국 보훈의 달 6월, 되돌아보는 국민대 역사

  • 07.06.07 / 최부석

    6월은 호국 보훈의 달이다. 나라를 위해 자신을 바친 호국 영령을 기리는 뜻깊은 날인 현충일도 올해로 벌써 52회째이다. 또 해방이후 대한민국의 역사와 같이 태동한 우리 국민대학교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달이기도 하다. 역사를 알면 미래가 보인다. 국민대의 역사에서 빠지지 않는 해공 신익희 선생과 창성동. 현재 남아있는 자취를 돌아보며 어느 대학보다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진 우리 국민대의 정신을 조금이나마 느껴보고 각자의 길에서 큰 의미를 부여해 보자.  

▶ 강동구 천호동 마을마당 공원에 위치한 해공 신익희 선생 像

  해공 신익희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요 위원이자 국민대의 창립자 이다. 김구, 김규식, 조소앙 과 더불어 '국민의 지도자' 를 양성하자는 민족적 교육의 뜻을 모아, 1946년 드디어 국민대는 개교하게 된다. 그해 9월 신익희 선생은 창학연설에서 "본 대학은 과거 40년동안 우리 국민 전체가 일제의 압박아래 신음한 것은 우리국민의 무지에 비롯한 것임을 통감하고 이 나라의 중견 국민을 양성해야 겠다고 일구 월심으로 생각한 그 큰 이상을 갖고 세운 것입니다. 목숨이 붙어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고매한 학식을 갖춘 교수 여러분과 구지욕에 불타는 총명 호학의 생도 여려분과 함께 국민대학 첫 입학생을 맞아 개강식을 갖게 되니 여러분들과 같이 일편 감개 무량하고 일편 감축해 마지않는 바입니다 " 라고 말하며 당시 대학가에는 없었던 민족론(民族論) 강의를 직접 하였는데 누구보다 나라를 사랑한 신익희 선생의 교육에 대한 큰 이상의 실천을 느낄 수 있다.

  국가와 민족, 교육에 일생을 바쳐온 선생은 이후 제 3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 당시 한강백사장 연설에 30만명이 운집하는 등 압도적인 지지를 얻고 있었으나 호남지방 유세 도중 급서하고 말았다. 이후 전국에 통곡소리가 울려 퍼지며 국민장을 치루었는데 선생의 업적만큼 수많은 인파가 거리를 가득 매웠다. '못살겠다 바꿔보자' 라는 구호로 당시 정권교체를 간절히 희망하던 국민의 거목이였던 신익희 선생. 선거 결과에서도 서울지역 득표수로 보면 당선된 이승만의 20만표보다 많은 28만여표가 추모표로 나와 국민들이 선생의 서거를 참담히 안타까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선생은 우리 국민대 뿐만 아니라 당시 국민들의 민족적 지도자였다.

 

▶ 종로구 효자동에 위치한 해공 신익희 선생의 옛집. 52회 현충일을 맞아 따사로운 햋빛과 만개한 꽃이 선생을 기리는 국민의 마음을 얘기하는듯 하다.

 

▶ 제 1회 졸업생이 기념으로 심은 플라타너스 나무 (1950년 식수), 현재 정부중앙청사 별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당시 신축교사 (1960년 완공), 모두 종로구 창성동에 있다.

   1950년 6월 24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하루전에 국민대는 제 1회 졸업생을 배출하게 된다. 당시 졸업생이 심은 기념식수는 2007년 현재도 사진에서와 같이 그 자리에 굳건히 서 있다. 20년후 기념식수 비문에서 "창학의 뜻을 이어 보려고 돌싸움까지 하였던 이 자리에 6.25 바로 전날 졸업기념으로 심은 프라타너스여!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잘도 자랐구나. 숱한 어려움과 곡절을 간직하고 홀로 학교를 지켰나니 그대 이곳에 선지 어언 스무돐, 모교에 남긴 너의 유래를 밝히 고자 여기 이 비문을 새긴다" 라고 감회를 얘기했다.

  내수동, 남산 동본원사에서 창성동, 백년대계로 자리잡은 현재의 정릉동에 이르기까지 미군정의 압박에 배움터를 수차례 옮긴 국민대는 우여곡절끝에 1948년 종로구 창성동의 구 체신이원양성소를 새 교사로 얻게 되었다. 이후 1959년에 완공된 철근콘크리트 신축교사는 정릉동 이전 전까지 국민대의 향학의 터가 되었으며 지금은 정부중앙청사 별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과거 국민대의 산 역사를 보여준다.

   우리대학은 남다른 교훈을 가지고 있다. '이교위가' 가 바로 그것이다. 반도국으로써 수많은 외세의 침략과 일제강점기를 이겨냈던 우리 역사에서 나라, 즉 그 정신적 터전은 무엇보다 중요한 민족의 기둥이였다. 가정에서 부터 기본이 되는 정신적 굳건함은 부국강병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 이념을 새겨 정신고양과 호국의 근원,배움의 터전인 학교도 우리가 지키고 가꾸어야 할 뿌리의 근원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학교홈페이지 '개교60주년기념사업' 메뉴에는 우리 국민대학교의 역사를 느껴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 영상이 마련되어 있다. 호국 보훈의 달인 6월을 맞아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그 역사를 같이한 우리대학의 발자취를 한번 되짚어 본다면 힘든 학기말 고사에 흐트러진 마음을 뿌듯한 자부심으로 다잡을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며 나아가 꿈을 위한 학문정진에 무한한 힘이 될 것이다.

  

제목 호국 보훈의 달 6월, 되돌아보는 국민대 역사 작성자 최부석
작성일 07.06.07 조회수 21627
첨부파일 구분 학부공지

    6월은 호국 보훈의 달이다. 나라를 위해 자신을 바친 호국 영령을 기리는 뜻깊은 날인 현충일도 올해로 벌써 52회째이다. 또 해방이후 대한민국의 역사와 같이 태동한 우리 국민대학교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달이기도 하다. 역사를 알면 미래가 보인다. 국민대의 역사에서 빠지지 않는 해공 신익희 선생과 창성동. 현재 남아있는 자취를 돌아보며 어느 대학보다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진 우리 국민대의 정신을 조금이나마 느껴보고 각자의 길에서 큰 의미를 부여해 보자.  

▶ 강동구 천호동 마을마당 공원에 위치한 해공 신익희 선생 像

  해공 신익희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요 위원이자 국민대의 창립자 이다. 김구, 김규식, 조소앙 과 더불어 '국민의 지도자' 를 양성하자는 민족적 교육의 뜻을 모아, 1946년 드디어 국민대는 개교하게 된다. 그해 9월 신익희 선생은 창학연설에서 "본 대학은 과거 40년동안 우리 국민 전체가 일제의 압박아래 신음한 것은 우리국민의 무지에 비롯한 것임을 통감하고 이 나라의 중견 국민을 양성해야 겠다고 일구 월심으로 생각한 그 큰 이상을 갖고 세운 것입니다. 목숨이 붙어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고매한 학식을 갖춘 교수 여러분과 구지욕에 불타는 총명 호학의 생도 여려분과 함께 국민대학 첫 입학생을 맞아 개강식을 갖게 되니 여러분들과 같이 일편 감개 무량하고 일편 감축해 마지않는 바입니다 " 라고 말하며 당시 대학가에는 없었던 민족론(民族論) 강의를 직접 하였는데 누구보다 나라를 사랑한 신익희 선생의 교육에 대한 큰 이상의 실천을 느낄 수 있다.

  국가와 민족, 교육에 일생을 바쳐온 선생은 이후 제 3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 당시 한강백사장 연설에 30만명이 운집하는 등 압도적인 지지를 얻고 있었으나 호남지방 유세 도중 급서하고 말았다. 이후 전국에 통곡소리가 울려 퍼지며 국민장을 치루었는데 선생의 업적만큼 수많은 인파가 거리를 가득 매웠다. '못살겠다 바꿔보자' 라는 구호로 당시 정권교체를 간절히 희망하던 국민의 거목이였던 신익희 선생. 선거 결과에서도 서울지역 득표수로 보면 당선된 이승만의 20만표보다 많은 28만여표가 추모표로 나와 국민들이 선생의 서거를 참담히 안타까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선생은 우리 국민대 뿐만 아니라 당시 국민들의 민족적 지도자였다.

 

▶ 종로구 효자동에 위치한 해공 신익희 선생의 옛집. 52회 현충일을 맞아 따사로운 햋빛과 만개한 꽃이 선생을 기리는 국민의 마음을 얘기하는듯 하다.

 

▶ 제 1회 졸업생이 기념으로 심은 플라타너스 나무 (1950년 식수), 현재 정부중앙청사 별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당시 신축교사 (1960년 완공), 모두 종로구 창성동에 있다.

   1950년 6월 24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하루전에 국민대는 제 1회 졸업생을 배출하게 된다. 당시 졸업생이 심은 기념식수는 2007년 현재도 사진에서와 같이 그 자리에 굳건히 서 있다. 20년후 기념식수 비문에서 "창학의 뜻을 이어 보려고 돌싸움까지 하였던 이 자리에 6.25 바로 전날 졸업기념으로 심은 프라타너스여!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잘도 자랐구나. 숱한 어려움과 곡절을 간직하고 홀로 학교를 지켰나니 그대 이곳에 선지 어언 스무돐, 모교에 남긴 너의 유래를 밝히 고자 여기 이 비문을 새긴다" 라고 감회를 얘기했다.

  내수동, 남산 동본원사에서 창성동, 백년대계로 자리잡은 현재의 정릉동에 이르기까지 미군정의 압박에 배움터를 수차례 옮긴 국민대는 우여곡절끝에 1948년 종로구 창성동의 구 체신이원양성소를 새 교사로 얻게 되었다. 이후 1959년에 완공된 철근콘크리트 신축교사는 정릉동 이전 전까지 국민대의 향학의 터가 되었으며 지금은 정부중앙청사 별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과거 국민대의 산 역사를 보여준다.

   우리대학은 남다른 교훈을 가지고 있다. '이교위가' 가 바로 그것이다. 반도국으로써 수많은 외세의 침략과 일제강점기를 이겨냈던 우리 역사에서 나라, 즉 그 정신적 터전은 무엇보다 중요한 민족의 기둥이였다. 가정에서 부터 기본이 되는 정신적 굳건함은 부국강병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 이념을 새겨 정신고양과 호국의 근원,배움의 터전인 학교도 우리가 지키고 가꾸어야 할 뿌리의 근원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학교홈페이지 '개교60주년기념사업' 메뉴에는 우리 국민대학교의 역사를 느껴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 영상이 마련되어 있다. 호국 보훈의 달인 6월을 맞아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그 역사를 같이한 우리대학의 발자취를 한번 되짚어 본다면 힘든 학기말 고사에 흐트러진 마음을 뿌듯한 자부심으로 다잡을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며 나아가 꿈을 위한 학문정진에 무한한 힘이 될 것이다.